한반도 근대 지질·자원 조사 전담 기구의 출현 및 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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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는 채방사라고 불리는 임시 관리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의 지질·자원을 조사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왕의 명령으로 광무국이라는 전담 부서를 만들어 지질·자원 관련 업무를 수행하였고 이는 대한제국까지 이어졌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일본에 의해 조선총독부 밑에 지질조사소와 연료선광연구소가 1918년과 1922년에 각각 설치되었고, 두 연구소를 통해 한반도 지질·자원 조사가 1945년까지 수행되었다. 두 연구소는 1945년~1948년 미군정 시기 지질광산연구소로 통합되고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의 상공부로 이관됨에 따라 마침내 대한민국이 주체가 된 한반도 지질·자원 조사·연구가 시작되게 되었다.
Abstract
According to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temporary government officials named ‘Chaebangsa’ were dispatched to investigate geology and mineral resources of the local areas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Bureau of Mine was established by the King Gojong’s command in the last part of the Dynasty, and this institute lasted until the end of the Korean Empire. During the Japanese colonization of Korea, the Geological Survey and the Institute of Fuel and Ore Dressing were established in 1918 and in 1922 respectively, and the two institutes conducted researches on geology and mineral resources of the Korean Peninsula until 1945. During the regime of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from 1945 to 1948, the two institutes were merged into Geological Survey & Institute of Mining Technology. After the transfer of the two institutes to the Ministry of Commerce and Industry of Korea, investigation and researches on geology and mineral resources of the Korean Peninsular could be restarted under the sovereignty of Korea.
Keywords:
Annals of Joseon Dynasty, Bureau of Mine, geological survey, institute of fuel and ore dressing, geological survey & institute of mining technology키워드:
조선왕조실록, 광무국, 지질조사소, 연료선광연구소, 지질광산연구소1. 서 론
2018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9월 남조선 과도 정부로부터 상공부를 인수하여 한국인 지질·자원 연구자들이 자주적으로 한반도 지질·자원 조사를 시작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1918년에 조선총독부가 설치한 지질조사소를 기준으로 하면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지질·자원 조사를 시작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또 서구식 지질·자원 조사도입의 역사라는 점에서 더 거슬러 오르면, 2018년은 1883년에 체결된 독일과의 통상조약에 따라 독일인 곳체(C. Gottsche)가 1884년 한반도에서 최초로 서구식 지질·자원 조사 활동을 시작하고 2년 후에는 한반도에서는 최초로 지질도를 포함하는 논문을 게재한 지 132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이 넘는 지질·자원 조사의 역사 이면에는 한반도에 매장되어 있는 자원을 수탈하고자 했던 서구의 야심과 한일 강제 병합을 통해 한반도의 자원을 약탈했던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가 있기도 하였다. 반면, 해방 이후에는 자원 개발 분야가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에 매우 큰 기여를 했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된 이후 가장 긴급했던 것이 자원의 확보였으며 한국지질자원연구원(KIGAM, Korea Institute of Geoscience and Mineral Resources)의 전신인 국립지질조사소가 용역을 발주하고 국내 지질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대한지질학회(GSK,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가 용역을 받아 1961년 9월에 본격적으로 태백산지구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62년 3월 보고서와 지질도를 발간함으로써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한 자원 확보의 주춧돌을 마련하였다.
최근 들어 이러한 과학적 발전에 대한 역사 기록을 찾고 정립하는 과학사 분야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그 학문의 발달사 정립을 시도하고 있다. 지질·자원 조사 분야의 경우에도 외국인에 의한 서구식 한반도 지질·광상 조사 성과 고찰 연구를 주제로 Kim and Lee (2015)는 최초로 서구식 지질·자원 조사 방법을 도입한 곳체의 활동(Gottsche, 1884, 1886), 한강을 따라 문경을 거쳐 부산까지 답사한 고우랜드(W. Gowland)와 이 시료를 분석한 홀란드의 연구(Holland, 1891), 그리고 이노우에(井上禧之助), 고토(小藤文次郞), 이또(伊藤稱次郞), 고바야시(小林貞一) 등 일본인들의 활동을 상세히 조사하였다(Koto, 1903, 1910; Kobayashi and Kim, 1931a, 1931b; Kobayashi, 1933; Ito et al., 1935; Ito and Katayama, 1936; Kobayashi and Aoti, 1942; Kobayashi et al., 1942). Kim et al. (2015)은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의 3대 소장인 다테이와 이와오의 한반도 지질 연구 또한 조사하였는데, 이는 지질조사소 설치 이후부터 해방까지 지질조사소의 한반도 지질·자원 조사 활동을 보여준다. 이후 Won et al. (2017)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지질·자원 조사 활동 기록을 발췌하고 이를 근거로 당시의 조사 활동을 분석하였다.
이 연구에서는 지질·자원 분야 발달사 연구의 일환으로 근대를 중심으로 지질·자원 조사를 전담했던 정부 부서의 출현과 1960년대까지 이들 부서의 변천 과정을 추적하고 시기별 주요 성과를 조사하였다. 연구를 위한 관련 기록 발췌에는 조선왕조실록, 조선총독부 관보, 미군정청 기록, 지질·자원 관련 보고서 등을 이용하였다. 이것이 근·현대 지질·자원 분야 과학사 정립의 초석들 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2. 조선시대의 지질·자원 조사(1392년~1910년)
2.1 1880년 이전
조선시대의 정부는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 체제였으며, 임진왜란 전까지는 육조 중 공조(工曹)에서 지질·자원 조사 활동을 담당하였던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Won et al., 2017). 이 당시에는 지질·자원 조사를 위해 공조의 추천을 받아 왕명으로 ‘채방사(採訪使)’라는 임시 관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금·은 광산 등 특산물 산지에 대한 탐사 임무를 가진 관리들이었다. 『태종실록 2권』 1401년 10월 25일 기록에는 “안동 채방사로 춘양현에서 은을 캐던 윤전(尹琠)을 날씨가 추워 소환하다.”라는 채방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으며(NIKH, 2013a) 이를 시작으로 임진왜란까지 채방사가 전국 각지에서 지질·자원 조사를 담당하고 자원을 채굴하여 왕에게 바친 기록들이 있다. 이를 통해 공조에서 채방사를 파견하여 지질·자원 조사를 담당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채방사는 대부분 정3품 또는 종3품의 전·현직 관원이었고, 관품에 따라 채방부사(採訪副使), 채방별감(採訪別監), 채방판관(採訪判官)으로 불리기도 하였다(Yu, 1979).
임진왜란 이후에는 호조(戶曹), 어영청(御營廳), 수어청(守禦廳), 친군영(親軍營) 등의 군과 관련된 여러 부서에서 지질·자원 조사 및 개발에 관여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Won et al., 2017). 그 중에서도 주로 호조에서 국가 지질·자원 조사 및 개발을 담당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선조실록 201권』 1606년 6월 14일 기록에는 “호조에서 양주 은광의 민간 채굴을 허용하자고 건의하다.”라는 기록이있으며(NIKH, 2013b) 그 외에도 광산과 관련된 기록에 대부분 호조가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2.2 1880년~1889년
1876년 문호 개방 이후 근대화 정책의 일환으로 새로운 중앙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1880년대에 설치되었다. 1880년대에 들어서서 고종을 필두로 한 개화 추진 세력들은 대외 통상에 의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이에 따라 개화 정책 추진을 위한 제도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Koo, 2002)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될 당시에는 통리기무아문 안에 공식적인 지질·자원 관련 기구는 없었으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폐지되었다가 다시 확대·개편된 이후에 본격적인 지질·자원 조사와 관련된 기구가 등장하였다. 『고종실록 19권』 기록에 따르면 1882년 11월 17일에 외치를 담당하는 통리아문(統理衙門)이 설치되었고(NIKH, 2013c) 18일에는 내치를 담당하는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 설치되었다(NIKH, 2013d). 두 기구는 같은 해 12월 4일 각각 통리아문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칭되었고 통리내무아문은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으로 개칭되었다(NIKH, 2013e). 그림 1과 같이 두 기구는 각각 여러 개의 부서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기구 중 통리군국사우아문의 장내사(掌內司)에서 공식적으로 지질·자원 관련 업무를 주관하게 되었다. 『고종실록 21권』의 1884년 9월 16일 기록에 따르면 장내사에서 광산 채취를 주관토록 하게 하였다(NIKH, 2013f).
전교하기를,
“다섯 가지 금속인 금(金), 은(銀), 동(銅), 철(鐵), 연(鉛)은 바로 자연에서 얻어지는 이로운 광물로서 백성들의 생활을 넉넉히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데 보탬이 되는 것이다. 광산을 개발하여 채취하는 일을 장내사에서 전적으로 주관하고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단속하여 영원히 금지시키되, 국(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등의 문제는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절목을 마련하여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 『고종실록 24권』의 1887년 4월 5일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지질·자원 개발에 관한 업무만을 전담하는 광무국(礦務局)을 개설하였다(NIKH, 2013g).
전교하기를,
“현재 광업(礦業)에 관한 업무가 점점 개시되고 있다. 중요한 일인 만큼 맡아서 다스리는 곳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따로 관서(官署) 하나를 설치하여 광무국이라 하고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 민영익(閔泳翊)을 총판(總辦)으로 차하(差下)해서 일체 시행해야 할 문제를 품지(稟旨)하여 차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광무국은 설치 이후 사적인 채굴, 세금 납부의 지연, 외국인의 채광 등으로 어수선하던 광업 사무를 정리하였고 광산이 있는 각지에 광무 감리를 파견하는 등 광산 관리를 더욱 체계적으로 하였다(Lee, 1972; Park, 1984). 1880년대는 근대 지질·자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한데, 이때에 곳체가 약 8개월에 걸쳐 한반도 지질 조사를 수행하여 최초의 한반도 지질도를 포함하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또한 고우랜드(Gowland)는 서울~조령~부산까지 고고학적인 시각에서 암석 샘플을 채취하였고 이후 1891년 홀랜드(Holland)가 학술지에 게재하였다(Kim and Lee, 2015). 이들의 한반도 지질·자원 연구 활동은 한반도의 지질과 자원 현황을 서구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3 1890년~1896년
1894년 갑오개혁을 거치며 근대적 행정 개혁을 실시하면서 지질·자원 조사를 전담하는 기구 또한 더 근대적으로 변화하였다. 『고종실록 31권』 1894년 6월 28일의 기록에 따르면 1차 갑오개혁을 통해 그림 2와 같이 8아문이 구성되었는데 조선시대 공조를 계승한 공무아문(工務衙門)과 일본 관제를 모방하여 신설된 농상아문(農商衙門) 내에 지질·자원 조사와 관련된 부서들이 하부에 위치하였다. 공무아문 하위 조직에는 “각종 광물에 대한 탐사, 시험, 수집, 보존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광산국(鑛山局)을 두었고, 농상아문의 하위 조직에는 “지질과 토질의 비옥 상태를 판정하고 식물과 비료, 광물에 대한 분석, 지형 측량, 지도 제작 등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지질국(地質局)을 두었다(NIKH, 2013h). 이후 2차 갑오개혁에서 7부로 개편되었고 농상공부의 광산국에서 지질·자원 관련 업무를 주관하였다. 『고종실록 33권』 1895년 3월 25일 기록에 따르면 농상공부 광산국의 업무 분장은 다음과 같다(NIKH, 2013i).
- (제9조) 광산국에서는 다음의 사무를 맡는다.
1. 광산의 조사와 기타 관영과 민영에 속하는 광산에 관한 사항이다.
2. 지질과 분석에 관한 사항이다.
위의 업무 분장을 통해 농상공부 광산국은 1차 갑오개혁의 광산국과 지질국을 통합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행정 개혁에도 불구하고 1894년 청·일전쟁의 여파로 약해진 행정력을 틈타 국내 주요 광산이 서구 열강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고 외국인에 의해 조사 활동이 이뤄지기도 하였다(KIGAM, 1990). 농상공부에서도 1896년 일본인을 위촉직으로 고용하여 대한제국 시기인 1898년까지 함경, 평안, 황해, 강원도 등을 조사하게 하고 그 결과를 수시로 발표하였다(KIGAM, 1990).
2.4 1897년~1910년(대한제국 시기)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며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황실 주도로 추진되는 개혁 사업의 재정 기반으로 삼고자 한반도의 주요 광산의 소유권을 궁내부(宮內府)로 이속시켰다(Jeon, 1999). 또한 광산 개발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고종실록 40권』에 따르면 1900년 9월 4일 “광무학교 신설 관제”를 반포하고 광무학교를 설립하였다(NIKH, 2013j). 설립 관제에 따르면 학교장 1명, 감독 1명, 교관 4명, 부교관 1명, 서기 1명으로 구성되었으며 학교장은 농상공부 광산국장이 겸임하였고 선진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프랑스인 트레몰레(Tremaulet)를 감독으로 고용하고, 나머지 교관들로는 프랑스인 광산 기사들을 고용하여 실습을 담당하게 하였다(Jeon, 1999; Kim and Lee, 2015). 또한 『고종실록 40권』 1902년 2월 16일 기록에 따르면 포달(布達) 제78호로 “궁내부 관제 중 광학국(礦學局) 증치에 관한 안건”을 반포하여 광산 소관의 실지 교육상의 일체 사무를 관장하게 하여 광무학교를 궁내부 광학국으로 이관하였다(NIKH, 2013k)(그림 3).
그러나 한국 정부의 지질·자원 조사 및 개발 방법을 근대화하기 위한 노력에 일본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04년 말부터 한국의 자원 침탈을 위해 전반적이고 종합적인 조사를 진행하여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직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반도 지질·자원 조사를 단행하였다. 한반도 전역을 5개 지역으로 나누어 10여명의 기사를 투입하고 1906년 1월에 조사를 완료하여 그 해 말 결과를 발표하였다(MAC, 1906; Kang, 1999). 그리고 1907년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이후에는 광업과·조사과·지질과로 구성된 농상공부광무국에서 광업을 포함한 모든 지질·자원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하여 한반도 자원 침탈을 본격화하였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시기까지 발표된 한반도 지질·자원 조사 결과로는 고용된 일본인 직원들이 조사한 조선광업조사보고 1~6권(1906년), 이노우에가 조사 결과를 정리하여 작성한 축척 1:150만의 한국지질광산도(1907년)와 한국 지질 및 광산보고서(1907년), 광상조사보고서 제1호(1910년) 등이 있다(그림 4).
3.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의 지질·자원 조사
3.1 1910년~1918년
1910년 8월 한일 강제 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농상공부 내의 광무과에서 광업을 포함한 지질·자원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JGGK, 1911). 명시된 업무에는 광업에 관한 사항과 평양광업소에 관한 사항이 있었으며 공식적으로 지질·자원에 관한 사항은 빠져있었다. 1915년 조선광업령이 공포되면서 광무과의 업무에 광업령에 의한 토지의 사용, 수용에 관한 사항이 추가되었다(JGGK, 1917). 비록 광무과의 공식적인 업무 분장에 지질·자원 관련 사항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광무과 안에서는 지질·자원 조사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 본격적인 한반도 자원 수탈을 위해 광상 조사반을 구성하여 1917년까지 한반도 전역을 대상으로 지질·자원 조사를 수행하였으며 조사 결과를 도별로 구분하여 조선광산조사보고 13권과 별도로 조선광산조사요보 2권을 발간하였다. 당시 광업 분야 발전의 영향으로 1917년 경성고등공업학교에 광산과가 신설되었으며 학과에서 한 해 졸업하는 5~6명의 졸업생 중 한국인은 2~3명 정도 있었다(Jeong, 1994).
3.2 1918년~1945년(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에서는 지질·자원 조사를 전담하는 전문연구소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1918년 5월 22일에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지질조사소를 설치하였다(JGGK, 1918). 조선총독부 광무과장이던 무라타(村田)가 지질조사소의 초대 소장으로 겸무하였고 지질과 화학 분석 전문가인 기사 4명과 지질, 화학 분석, 지형 측량, 제도 전문가인 기수 4명으로 지질조사소 인력이 구성되어 한반도 도폭 조사를 중심으로 광상, 토목 지질, 지하수 및 온천조사 연구를 시작하였다(KIGAM, 1990). 그림 5는 1919년에 설치 1년을 기념하여 광화문 청사 앞에서 촬영한 직원 사진이며 일부 한국 직원도 포함되어 있다. 1937년까지 지질조사소는 주로 한반도의 자원개발과 미개발 지역 개발을 위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해 활동한 반면, 1937년 발발한 중·일 전쟁과 1941년 발생한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의 광물 자원수요 급증 문제 해결을 위한 광업 개발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사와 탐사를 크게 벌이게 되었고 일본군의 점령 지역의 자원 조사에도 참여하게 되었으며 1945년 기록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마지막 해의 인원은 기사 15명, 기수 13명까지 증원되었다(Kim et al., 2015). 조선총독부 및 소속 기관 직원록(JGGK, 1919)에 명시된 지질조사소의 사무 분장 규정 중 조사계의 업무는 아래와 같으며 공식적인 사무 분장 규정은 해방될 때까지 변화가 없었다.
- 지질조사소 조사계에서는 다음 사무를 취급한다.
1. 지질 조사에 관한 사항
2. 광상 및 유용 광물의 검정에 관한 사항
3. 광업용 및 공업용 재료의 분석과 시험에 관한 사항
4. 지질도와 그 외의 간행에 관한 사항
5. 지질 및 광물에 관한 표본의 수집과 정리에 관한 사항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잡보 기록에 따르면(GSJGGK, 1937) 정식 직원인 기수 또는 기사로 고용된 한국인 직원은 1918년 5월 개소와 동시에 입소한 허병두(1933년 4월 퇴소)와 1920년 3월에 입소한 이규종(1924년 12월 퇴소) 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수 명의 촉탁, 고용원, 임시 고용원들이 지질조사소에서 근무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 및 연료선광연구소에서 발간했던 조사·연구 보고서 목록은 상무부 지질광산연구소에서 발간한 지질광산연구소 개요(GSIMT, 1948)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림 6은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지질학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그 보존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에 등록 문화재 제603호로 지정된 조선지질도이며 1:50,000 축척으로 작성된 61매의 지질도가 총 1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3.3 1924년~1945년(조선총독부 연료선광연구소와 광산 관련 교육 기관)
1921년 일본인 학자와 기업인으로 구성된 조선 산업 개발 위원회가 조선의 지하 자원 개발 촉진책의 일환으로 연료선광연구소의 설치를 건의하였고 1922년 10월 3일 조선총독부가 연료선광연구소 설치를 결정(JGGK, 1922)하였다. 연료선광연구소의 공식적인 사무 분장 규정은 아래와 같다(JGGK, 1924).
- 연료선광연구소에서는 다음 사무를 취급한다.
1. 탄전 조사에 관한 사항
2. 석탄의 이용 방법 조사 연구에 관한 사항
3. 그 외 연료의 조사 연구에 관한 사항
4. 선광 제련 시험에 관한 사항
1933년에는 업무 분장에 일부 변화가 있었는데, 탄전 조사에 관한 사항이 업무에서 빠지게 되고 광물의 분석 시험과 감정에 관한 사항이 추가되었다(JGGK, 1933a). 지질조사소가 지질·자원의 학문적 연구나 자원 개발을 위한 연구에 치중했던 것과는 달리 연료선광연구소는 실제적 문제 해결과 업계와의 공동 연구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초기직원은 석탄 조사 9명, 석탄 시험 6명, 선광 제련 시험 4명으로 구성되었다. 연료선광연구소는 1920년 초창기에 연료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한 탄전 조사와 석탄 시험에 중점을 두었고, 1930년대에는 산금 정책에 부응하는 금·은광의 처리법 연구, 1940년대에는 지질조사소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여파로 군수 물자 조달을 위한 선광법 연구를 수행하였다(KIGAM, 1990). 연료선광연구소의 또 다른 주요 기능 중 하나는 광업 기술자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광업 기술원 양성이었다. 이에 따라 1933년 5월 19일 연료선광연구소 부설 광업기술원양성소가 개소(JGGK, 1933b)되어 1935년부터 1945년까지 11회에 걸쳐 총 173명(한국인 112명, 일본인 61명)의 광산 기술 전문 인력을 배출하였다(GSIMT, 1948).
광업기술원양성소 외에도 광상 개발의 영향으로 다른 광업 관련 교육 기관도 등장했다. 광업가 겸 사회사업가인 이종만에 의해 대동공업전문학교가 1938년 6월에 설립되어 기계·광상 관련 과목을 가르쳤으며 이 학교는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으로서 큰 의미를 지녔다(Kim, 2005). 1939년 4월에는 일본인 광업가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경성광산전문학교가 관립 형태로 설립되었고 1941년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가 설립되고 이공학부내에 광산야금학과가 설치되어 지질·자원을 포함한 광업에 관련된 고등교육을 가르쳤다(Kim, 2005).
4. 미군정 시기의 지질·자원 조사(1945년~1948년)
일본 패망 이후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 정부 수립까지 미군이 휴전선 이남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미군정청이 1945년 10월에 한반도의 지질·자원 조사를 수행하고 있던 지질조사소와 연료선광연구소(부설 광업기술원양성소 포함)를 접수하였다. 한국 측 대표(정창희와 정혼헌)와 일본 측 대표(다테이와와 가미하라)가 지질조사소와 연료선광연구소 인수·인계서에 서명한 후 이를 미군정청에 인도하였으며, 두 연구소는 미군정청 광공국 광무과 소속으로 존속하였다. 미군정청은 두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11월 15일에 공식적으로 박동길을 임명하고 초대 소장에게 두 연구소의 통합을 요청하였다(Park, 1981). 1946년 2월 13일 미군령 제48호(USAMGIK, 1946a)에 의해 광공국이 상무국으로 개칭되고 미군령 제64호(USAMGIK, 1946b)에 의해 국이 부로, 과가 국으로 승격하여 1946년 3월 29일에는 미군정청 상무부 광무국 소속으로 국가 지질·자원 연구를 전담하였다. 그리고 박동길 소장의 회고록(Park, 1981)에 의하면 1946년 4월에 지질조사소와 광업기술원양성소를 포함한 연료선광연구소가 통합되어 미군정청 지질광산연구소로 발족한 것으로 기술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청 자료에는 통합 시점이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통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7년 5월 17일에는 미군령 제141호(USAMGIK, 1947)로 미군정청은 남조선 과도 정부로 명칭이 변경되어 지질광산연구소는 남조선 과도 정부 상공부 지질광산연구소로 존속하였다. 지질광산연구소는 전문 인력의 부족과 예산 부족으로 실직적인 조사와 연구를 하지는 못하였으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상동 광산을 비롯한 127개의 광산과 9개의 탄전을 광업계의 요구와 미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단편적·개략적으로 조사하며 국가 지질·자원 전문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KIGAM, 2015). 1946년에는 경성대학을 비롯한 여러 전문학교가 서울대학교에 편입되고 재편성되면서 국내 최초로 지질학과가 서울대학교 이학부에 설치되어 지질·자원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1947년 4월에 대한지질학회가 창립되어 학술 교류 활동을 시작하였다.
5.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지질·자원 조사(1948년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1948년 9월 13일 대통령령 제3호(Republic of Korea, 1948)로 대한민국 정부가 남조선 과도 정부의 기구를 인수하였다. 이때에 미군정청 소속의 중앙지질광물연구소가 대한민국 정부의 상공부 산하로 자연스럽게 인계되었으며 이것을 현재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창립 유래로 여길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 아래 우리 국토에 대한 자주적인 지질·자원 조사가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박동길 소장의 회고록(Park, 1981)에 의하면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더불어 지질광산연구소가 중앙지질광물연구소로 개칭되었으나 법적으로는 1949년 4월 26일에 대통령령 제78호(Republic of Korea, 1949)로 중앙지질광물연구소 직제가 제정되었고 1933년 이래 존속했던 부설 광업기술원양성소가 폐지되었다.
개편 이후에도 대한민국 정부 아래에서 한국인이 주도하는 지질·자원 조사의 시작은 녹녹치 않았다. 전문 인력 감소와 예산 부족으로 자체적인 연구가 미진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반발하여 조사와 연구를 중단한 체 대한민국 정부가 피난을 갔던 부산에서 임시 연구소로 연구 기관으로서의 명맥만을 유지하였다(Park, 1981).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전쟁의 여파로 지질·자원 조사는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국제연합(United Nations) 산하 기관인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 Korea Reconstruction Agency)이 1954년 3월 29일에 대전광물시험소를 설립하면서 광업 발전에 일조하였고 선광 시험과 분석·감정 업무가 수행되었다. 한국재건단의 원조를 통해 국가 지질·자원 전문 기관인 중앙지질광물연구소 또한 국내의 금속 광물과 석탄, 사광 등의 탐사와 개발을 활발히 수행하였고 1956년 6월 한국재건단의 대전광물시험소를 흡수하여 중앙지질광물연구소 대전 지소(그림 7)로 개칭하면서 국가적으로 지질·자원 조사·연구·분석이 활발히 수행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또한 1956년에는 국내 지질·자원 전문가들에 의해 1:100만 대한지질도가 발행되기도 하였으며 이는 국내 지질학자들만의 노력으로 연구되고 편집된 최초의 지질도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그림 8).
중앙지질광물연구소 이외에 1960년대 이전에 설립된 지질·자원 관련 기관으로는 1950년 11월에 설립된 대한석탄공사가 있었으며 석탄의 생산과 공급을 담당하도록 하는 한편 석탄 개발에 민간 자본이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 지질학과에 이어 1953년에는 부산대학교 문리과대학 내에 지리지질학과가 출범하면서 지질·자원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GSK, 2007).
이러한 지질·자원 분야의 태동과 함께 1955년 “석탄 산업 합리화 기본계획”을 정부 차원에서 수립한 것을 시작으로 광업이 발달하면서 지질·자원 조사 및 연구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1960년대 금속광물 및 석탄 자원에 대한 활발한 조사로 이어졌다.
6. 결 론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지진, 화산 폭발, 광산 개발, 온천 등과 관련된 일화들을 기록하고 보존하며 지질·자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전문 인력인 채방사가 등장할 정도로 국가적으로 지질·자원 조사를 중요시하였다. 조선시대 공조와 호조로 이어오던 지질·자원 관련 업무는 국가적으로 근대적 조직이 형성되고 있던 1884년에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장내사라는 부서에서 여러 업무 중 하나로 맡게 되었다. 차츰 자원 개발이 더욱 활발해지자 1887년에는 광업 부분의 전담 부서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때에 왕명으로 광무국이 신설되며 근대적 지질·자원 전담 기구가 출현하였다. 이후 갑오개혁으로 인해 공무아문의 광산국과 농상아문의 지질국이 지질·자원 업무를 나누어 담당하다가 두 아문이 농상공부 광무국으로 통합되어 이 광무국이 지질·자원 부분을 전담하게 되었다. 비록 외국 전문가들에 의해 수행되기는 하였으나 1880년대 이후 서구식 지질 조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되기 시작했다. 1897년 이후(대한제국 시기)에는 한반도 주요 광산을 궁내부에서 관할하고 광무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주적인 지질·자원 개발에 노력하였으나, 1907년 한일신협약 이후 관련 업무가 농상공부 광무국으로 이관되고 광무학교가 폐교되는 시련을 겪었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광무과에서 지질·자원 업무를 담당하여 한반도 전 국토의 대한 지질 조사를 수행하였고 1918년 지질조사소가 설치되어 지질도 발간을 시작하며 전문적으로 한반도 지질·자원 조사가 시작되었다. 또한 1922년 연료선광연구소와 1933년 부설 광업기술원양성소의 설립으로 지질·자원 분야의 선광·제련 부분 시험 및 연구와 광업 전문 인력 양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지질조사소와 연료선광연구소(부설 광업기술원양성소 포함)가 미군정청에 인계되었고 두 기관이 통합되어 지질광산연구소가 발족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에 지질학과가 설치되고 이들을 중심으로 대한지질학회가 창립되며 통합·발족된 지질광산연구소와 함께 한국인 주도의 지질·자원 조사를 시작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질광산연구소가 중앙지질광물연구소로 개칭되고, 같은 해 9월 남조선 과도 정부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인계되면서 드디어 한국 정부와 한국인 주도의 지질·자원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듬해 중앙지질광물연구소 직제가 만들어지며 공식적인 국가 연구소로 거듭나지만 전문 인력 및 예산 부족의 당시 상황과 한국전쟁 반발로 인해 연구가 거의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쟁을 극복하고 경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중앙지질광물연구소를 중심으로 지질·자원 조사·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되었고, 한반도의 자원 개발을 위해 조사·연구를 전담하며 1960년대 대한민국 경제 성장의 주춧돌이자 원동력이 되었다.
Acknowledgments
이 연구는 2016년~2017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자체사업인 ‘100주년 기념사업 로드맵 수립 연구(16-7511)’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습니다. 연구 수행에 도움을 주신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글로벌협력부와 기획실 직원분들, 그리고 논문 수정을 위해 세심한 의견과 유익한 조언을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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