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ms & Scope

Journal of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 - Vol. 53 , No. 3

[ Article ]
Journal of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 - Vol. 53, No. 3, pp. 377-386
Abbreviation: J. Geol. Soc. Korea
ISSN: 0435-4036 (Print) 2288-7377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30 Jun 2017
Received 23 May 2017 Revised 21 Jun 2017 Accepted 27 Jun 2017
DOI: https://doi.org/10.14770/jgsk.2017.53.3.377

전라북도 곰소만 일대의 전통 소금(자염) 생산 기록으로 본 현세 후기 해수면 변동
남욱현1 ; 최정해2,
1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환경연구본부
2한국지질자원연구원 전략기술연구본부

Late Holocene sea level changes inferred from the traditional salt (Jayeom) production of the Gomso Bay, Korea
Wook-Hyun Nahm1 ; Junghae Choi2,
1Geologic Environment Division, Korea Institute of Geoscience and Mineral Resources, Daejeon 34132, Republic of Korea
2Climate Change Mitigation and Sustainability Division, Korea Institute of Geoscience and Mineral Resources, Daejeon 34132, Republic of Korea
Correspondence to : +82-42-868-3944, E-mail: jhchoi@kigam.re.kr


Copyright © 2017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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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소금은 바닷물을 끓여 증발시켜 얻는 자염이다. 부안과 고창 일대의 곰소만에서는 바닷물을 농축시킨 함수를 얻기 위해서 섯구덩을 만드는데, 이때 섯구덩의 위치는 갯벌 최상부의 사리(대조) 때에만 바닷물이 들어오는 가장 육지쪽 장소를 선택하게 된다. 고문헌 기록을 근거로 고창군 심원면 사등마을의 검당포(검당마을) 일대의 섯구덩의 위치가 역사시대 동안 변하였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1900년대 초기에는 검당마을 바로 앞에 섯구덩을 만들었다. 500년 전후 시기에는 백제 때의 제방인 김제 벽골제, 익산 황등제, 정읍 눌제의 위치와 기능을 근거로 섯구덩의 위치가 1900년대 초기의 위치와 거의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1500년 전후 시기에는 조선 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의 기록을 근거로 섯구덩의 위치가 바다쪽으로 약 800 m 정도 들어간 곳으로 옮겨졌으며, 1800년대 이후에는 <택리지>(1751)와 <지방지도>의 고부군 지도 (1872) 등의 기록을 근거로 섯구덩 위치가 다시 검당마을 바로 앞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1500년대와 1800년대 이후에 섯구덩 위치가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해수면 높이의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역사 기록에 의해 추론한 해수면 변화는 지역적이나 전지구적 해수면 변동 양상과 거의 일치한다.

Abstract

The traditional salt of Korea is the boiled salt obtained by boiling the sea water. In the Gomso bay around Buan and Gochang areas, people made a salt field on tidal flat sediments to obtain dense salt water. At this time, the location of the salt field would be on the most upper part of the tidal flat where the sea water comes in only at the time of spring tides. Based on the records of ancient documents, the locations of the salt field in the area of Gumdang village of the Gomso bay have been changed during the historical period. In the early 1900s, the salt fields were in front of Gumdang village. Several tide embankments around the Gomso Bay including Byokgolje (Gimje), Nullje (Joengeup), and Hwangdeungje (Iksan) were believed to be build in around AD 300-500. Based on this, the salt field sites would have been similar in about AD 500. In around AD 1500, "Sinjeung Donggukyeojiseungram" (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reported the locations of the salt field were moved about 800 m toward the sea. However, the records from "Taekliji" (擇里志, 1751) and "County map" (地方地圖, 1872) suggest that the salt field were moved back on the recent positions. The salt field positions of the 1500s and the 1800s differ and imply that the sea level positions have been changed. Such sea level changes inferred from the historical records closely coincides with regional and global sea level variations.


Keywords: Gomso Bay, salt production, Jayeom, holocene, sea level change
키워드: 곰소만, 소금 생산, 자염, 현세, 해수면 변동

1. 서 론

Shepard and Suess (1956)가 빙하가 녹으면서 전지구적으로 해수면이 상승한다는 것을 보고한 이후, 많은 과학자들은 해수면 상승에 있어 다양한 요인이 있음을 인지하였다. 그 요인은 육상 빙하와 관련된 유스타시(eustasy)와 해양의 열적 팽창과 같은 전지구적 요인, 지각평형운동(isostasy)과 같은 광역적 요인, 그리고 화산활동, 퇴적물 유입, 조수의 변화 등과 같은 지역적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각 요인의 영향 정도에 따라서 해수면 변화 양상이 지역적으로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Vink et al., 2007). 최근에는 이러한 자연적인 요인과 인간의 활동에 의한 요인을 구분하여 온난화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하고 있다(Dangendorf et al., 2015). 이를 위해서는 인간이 본격적으로 해수면 변화나 해안 지형 변화에 개입한 지난 약 2000년 전 동안 해수면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한반도에서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시대의 해수면 변동이 사람들의 해상 항로, 물류 유통, 농업과 어업, 국토 방위 등 전방위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음은 자명한 사실이겠지만, 해수면 변동 양상과 그 영향 범위를 세세하게 밝히기는 매우 어렵다. 연속적인 관측 기록을 기대할 수 없을 뿐더러, 인간 활동의 영향으로 과거 해수면 변동의 기록이 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수면 변동의 폭 자체도 빙하기-간빙기의 변동 폭에 비하여 매우 작아서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해수면 변동은 기본적으로 전지구적인 기후 변화와 지역적인 퇴적물 공급 등과 연동되며, 이는 다시 강수 양상, 식생 피복의 종류, 하천 발달, 인간 활동 등과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해수면 상승과 하강이 언제 어떻게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자연환경 변화 양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고 기초적인 연구이다.

기후 변화와 해수면 변동이 인간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연구는 유럽과 중국 등지에서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수행되어 왔다(Hwang and Yoon, 2013). 기원 전후의 고대 문명은 자연환경이 약간만 변하거나 일시적인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큰 타격을 받고 심지어 문명이 해체되는 경우도 있었다. 점차 문명이 고도화 되면서 자연환경 변화에 대응을 하고자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심지어 현재에도 기후 변화와 해수면 변동에 대비하기 위한 비용과 자연재해에 대비하거나 피해 복구를 위한 비용은 천문학적 규모이며, 여전히 큰 부담으로 남아있다. 자연환경 변화에 대해서 역사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적응해 왔는지 그들의 생각과 활동을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본 연구는 우리나라 서해안 갯벌에서의 전통 소금(자염) 생산이 조수간만 차이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해수면’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역사시대 해수면 변동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비록 정성적이고 불완전한 기록이지만 서해안 지역의 해수면 변동 양상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데에는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2. 연구지역(칠산바다와 곰소만)
2.1 칠산바다

칠산바다는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앞바다의 전라남도 영광군 낙월면 낙월도, 송이도, 칠산도에서 시작해서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위도를 지나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비안도에 이르는 해역을 말한다. 칠산도 부근의 칠산바다는 원래 일곱 봉우리로 둘러싸인 칠산마을이라는 육지였는데 하루아침에 바다로 변했다는 ‘서씨 노인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Kim, Y.D., 2008). 칠산바다는 조기, 병어(자랭이), 덕대(덕자), 대하, 서대, 장어 등 다양한 어종이 분포하여 황금어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위도 띠뱃놀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음력 정월 초사흗날 위도 앞바다에 갈대로 만든 띠배를 띄워 보내며 풍어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풍어제로서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3호로 지정되었다. 대표적인 어종은 단연 칠산조기(참조기, 농어목 민어과)이다. 참조기는 제주도 부근에서 겨울을 나고, 2월 정도에 흑산도 근해를 따라 북상하여 3월 정도에 칠산바다 일대에서 산란을 시작하며, 5-6월 정도에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 연평도 부근을 지나 발해만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남하한다. 그래서 음력 3월 곡우(양력 4월 20일 경) 무렵이 되면 칠산바다 일대에 참조기 어장이 형성되는데 이 때 잡히는 참조기를 ‘곡우사리조기’라 부른다. 칠산바다는 인천의 연평도 일대에 비하여 한양(서울)으로 부터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장거리 운반을 위하여 영광과 부안 일대를 중심으로 소금을 이용한 염장 기술이 발달하였다.

2.2 곰소만

칠산바다가 육지쪽으로 깊게 파고 들어가 있는 부분을 곰소만이라 한다(그림 1). 북쪽으로는 부안군 변산면 궁항, 남쪽으로는 고창군 해리면 동호해수욕장에서 시작하여 육지 안쪽으로 고창군 흥덕면 후포리에 이르는 폭 7-9 km, 길이 20 km 정도의 넓고 긴 반폐쇄형 만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부안군의 진서면, 줄포면, 보안면, 그리고 고창군 흥덕면, 부안면, 심원면을 포함한다(Yoo, 2009). 곰소만은 고부만이라고도 한다. 이는 <대동여지도>(1861)에 곰소만 일부가 고부군(정읍시 고부면 일대)에 속한 것으로 표시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곰소만은 줄포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1920년대에 곰소만 일대에서 줄포가 가장 큰 포구였다는 점에서 유래한 것이다. 줄포 지역은 원래 주을(主乙)이라 불렀으며, <고려사>(1451)의 식화지(食貨志) 조운조(漕運條)에는 여섭포(勵涉浦)라는 명칭으로 나온다. 그 이후 무포(無浦), 제안포(濟安浦) 등으로 불렀으며, 줄포(茁浦)라는 명칭은 1920-1930년대에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Kim, H.J., 2008). 한편, 곰소는 <광여도>(1800)에는 웅연도(熊淵島)로, <조선팔도지도>(1700)와 <대동방여전도>(1861)에 웅연(熊淵)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민간에서는 웅소(熊沼)라고 부르기도 하였다(그림 2).


Fig. 1. 
3-D map showing the geomorphology of the study area (around the Gomso Bay).


Fig. 2. 
Ancient maps showing the geography of the study area, (a) Daedongyeo-jido, 1861, (b) Gwangyeo-do, 1800?, (c) Chosun Paldo-jido, 1700?, (d) Daedong Bangyeo-jeondo, 1861.

곰소만 주변의 기반암은 선캠브리아기 결정질 편암, 쥐라기 대보화강암, 백악기 화산암류 등으로 구성된다. 곰소만 주변에는 산지가 많이 분포한다. 주요 산지로는 북쪽 변산반도의 의상봉(509 m), 쌍선봉(459 m), 세봉(400 m), 신선봉(491 m) 등이 있으며, 남쪽에는 소요산(444 m), 경수산(444 m), 옥녀봉(433 m) 등이 위치하고 있다.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수계(水系)는 남북과 서쪽 방향으로 형성된 소하천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 주진천은 인천강, 인내강, 장숙강, 장연 등으로도 불리며,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수랑동 명매기샘에서 발원하여 곰소만으로 유입되는 유로연장 29.3 km의 하천이다. 갈곡천은 해천(蟹川), 게천 등으로도 불리며, 방장산(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북동쪽에서 발원하여 고창군 흥덕면과 부안면의 경계를 흐르다가 사포를 지나 곰소만으로 들어가는 유로연장 15.7 km의 하천이다(Hong, 2008).

곰소만 해안에는 매우 완만하게 갯벌이 발달하였다. 조석 분조(tidal constituents)는 전형적인 반일주조(semidiurnal tides)이며, 평균 4.3 m 정도의 조차(대조시 6.0 m, 소조시 3.5 m)를 보이는 대조차(macrotidal) 환경이다. 곰소만 중앙부에는 갯골이 크게 발달해 있다. 이 갯골을 '곰소깡'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썰물 때에도 수심이 20 m 정도로 깊어 예로부터 어업 활동이나 물자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조차가 크고 물의 흐름이 복잡한 곳에서 안전한 항해를 위한 염원은 수성당(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의 ‘개양할미 설화’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Lee, 2010).

참고로, 우리나라 정부는 2006년 12월 부안군 줄포면과 보안면 일대 4.9 km2의 갯벌을 습지보전법에 따라 부안 줄포 갯벌 습지보호지역으로, 그리고 2008년 1월 전북 고창군 부안면과 심원면 일대의 10.4 km2의 갯벌을 고창 갯벌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한 바 있다. 2010년 2월에는 부안 줄포 갯벌 습지보호구역 4.9 km2와 고창 갯벌 습지보호구역 10.4 km2 외에 고창군 주변의 갯벌 30.2 km2을 포함하여 총 45.5 km2의 갯벌을 다수의 멸종위기종 조류 및 전세계 물떼새(흰물떼새) 개체수의 1% 이상이 서식하는 특징을 갖는 람사르습지로 등록하였다. 참고로, 2014년 우리나라 갯벌 면적은 2487 km2로 전체 국토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전라북도에는 118.2 km2의 갯벌이 있으며, 전국 갯벌의 4.8%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갯벌은 (1) 캐나다 뉴브런스윅, 노바스코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일대의 캐나다 동부 연안, (2) 미국 동부 조지아 주의 연안, (3) 브라질 아마존 강 하구 삼각주, (4) 유럽 덴마크, 독일, 네덜란드의 북부 와덴해 연안 등과 함께 세계 5대 갯벌로 꼽히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정목록(tentative list)에 포함되어 있다.


3. 기존 문헌 조사
3.1 곰소만 일대의 포구

곰소만에는 포구가 많았다. 검당포, 석포, 왕포, 남포, 외유포, 내유포, 검모포, 상포, 우포, 줄포, 사포, 후포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고 내륙 지역이 되어 대부분 잊혀졌다. 곰소만에서 가장 내륙쪽의 포구는 고창군 흥덕면에 위치한 사포와 후포로 알려져 있다. <택리지>(이중환, 1751)에는 나주 영산포, 영광 법성포, 흥덕 사진포(사포)를 거론하면서 강 규모는 작지만 바다와 통하기 때문에 장삿배가 모여든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암행어사 유경(1756-?)은 호남 일대를 시찰하고 조선 22대 정조 23년(1799)에 서계(보고서)와 별단(첨부문서)을 올리면서 '정읍 등 일곱 고을의 전세(田稅)를 실어 나를 곳'으로 사포를 추천한 바 있다. 사포와 후포는 1920년대 까지 어물과 미곡거래가 활발했다. 그러나 그 이후 토사 유입, 어선의 대형화, 그리고 정치적 이유로 포구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면서 줄포가 곰소만의 중심 포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줄포는 1875년 항만을 구축하고 개항하였으며,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걸쳐 크게 번성하였다. 그 후 줄포 일대에도 토사 퇴적이 심해졌다. 곰소는 부안군 진서면 연동마을에서 범섬(호도), 곰섬(웅연도), 까치섬(작도)을 연결하는 제방을 축조하면서 1942년에 항구가 되었는데, 1958년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줄포에서 곰소항으로 옮겨 오면서 번창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토사 퇴적 문제로 1987년 부터는 격포항이 교통과 물류를 담당하게 되었다. 곰소는 <만기요람>(서영보, 심상규, 1808)에 ‘전통 소금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으로 소개될 정도로 염전이 많았으며, 지금도 천일염을 이용한 운저리(망둥어), 쇠빙어, 오징어, 숭어, 도다리, 쭈꾸미, 꼴뚜기, 낙지, 전어, 갈치, 밴댕이 등의 젓갈로 유명하다(Yu, 2001).

3.2 곰소만 일대의 해안선 변화(간척과 매립)

간척으로 농경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은 고려시대 부터 있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세종장헌대왕실록>(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1472)은 “지금 인구는 날로 늘고 토전(土田)은 유한하여 백성들이 경작을 하지 못하여 산업을 잃게 된다. 빈해의 주군에는 해택(海澤, 갯벌)에 둑을 쌓아 수전을 만들 수 있는 곳이 대단히 많으나 민력이 미치지 못하여 그 이익을 얻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목민심서>(정약용, 1818)에는 “바람 탄 조수의 형세가 멀리 큰 바다에서 밀려와서 바로 제방을 치면 큰 성도 무너질 참인데, 진흙덩이야 논해서 무엇하겠는가”라고 제방 축조의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간척과 매립이 진행되었다. 고창군 흥덕면 후포리와 신덕리 일대에서 91,000평(1936), 고창군 부안면 송현리와 선운리 일대에서 2,790,000평(1931),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와 고전리 일대에서 2,040,000평(1939) 등 대규모 매립이 진행된 바 있으며, 간척을 위한 방조제 축조도 부안군 진서면 곰소리 연동 방조제(1940, 길이 150 m),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암1 방조제(1952, 길이 530 m),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만돌 방조제(1955, 길이 786 m),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 줄포 방조제(1956, 길이 354 m),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운호 방조제(1961, 길이 594 m),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 마동 방조제(1972, 길이 240 m),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 석포 방조제(1975, 길이 1,940 m),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암2 방조제(1975, 길이 1,300 m), 부안군 줄포면 우포리 선양 방조제(1999, 길이 975 m) 등 여러 건이 있었다. 또한 이렇게 새롭게 조성한 간척지와 매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오산저수지(1945), 고창군 심원면 도천리 도천저수지(1945), 고창군 심원면 연화리 연화저수지(1945), 고창군 심원면 궁산리 궁산저수지(1945),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암저수지(1952),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수동저수지(1987) 등을 축조하였다(Kim, Y.J., 2004).

한편, 1900년대 부터 농지 확보를 위하여 대규모로 이루어진 야산 개발 등으로 인하여 다량의 토사가 곰소만으로 유입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위적인 환경 변화에 따라 그 많았던 포구의 경제지리학적 위치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Hong, 2008).

3.3 곰소만과 소금 산업

바닷물을 끓여 증발시켜 얻는 소금을 자염이라 하며, 이러한 자염을 만드는 곳을 염장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금은 바로 이 자염이다. 18-19세기 곰소만 일대에서는 도처에 많은 염장이 들어설 정도로 자염 생산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고부군 부안면, 부안현 건선면, 입하면, 좌산내면, 흥덕현 북면, 무장현 심원면 등이 유명하였다(Hong, 1994). 조선 21대 영조 27년(1751), 균역법을 시행할 때에 고부군, 부안현, 무장현의 염세가 전국 최고액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곰소만 제염 산업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심춘순례>(최남선, 1926)에는 “버드내로 하여 야영(野營) 같이 산재한 염막(鹽幕)을 보면서 포변(逋邊)으로 나가노라면 '실음거리 고개'라는 소나무 등성이 하나를 넘어서 구(舊)의 검모포진(黔毛浦鎭), 금(今)의 진서리에 당도하니...”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버드내), 곰소를 지나 내소사로 가는 길에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어 내는 움막(염막, 벌막)이 많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곰소만의 자염 생산 역사는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 검단선사(黔丹禪師)의 선운사 창건설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검단선사는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의 경지를 얻는다는 뜻에서 선운사를 세웠다. 이 지역에 도적이 많아 검단선사는 이들을 교화시키면서 스스로 먹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닥나무로 한지를 만드는 방법, 숯을 만드는 방법, 그리고 바닷가에서 소금을 만드는 방법 등 3가지 방법을 일러주었다. 한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발전시켜 현재 전주 한지 공장의 모태가 되었다.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은 고창군 심원면 사등마을의 검당포(검당마을)에서 지금도 소금을 만들고 있으며, 지금까지 1500년 동안 매년 봄과 가을에 소금을 선운사까지 옮겨 보시하는 이운식(移運式)과 선제(禪祭)를 열고 있다. 이 소금을 은혜 갚는 소금이라 하여 보은염 또는 공양염이라 부른다(Lee, 2011).

이렇게 바닷물을 끓여서 만드는 자염은 1907년 일본이 도입한 천일염에 밀리게 된다. 천일염은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놓고 햇볕으로 수분을 증발시켜 점차 염분의 농도를 높여 결정시키는 천일염전법으로 만드는데, 이는 대만의 갑종제염전(甲種製鹽田) 방식을 원용한 것이다. 일본은 1907년 당시 경기도 인천부 주안면 십정리에 1정보(약 3천평) 넓이의 염전을 만들었으며, 1910년 10월에는 천일염 분쇄공장을 세웠다. 이 주안염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이다. 그 이후의 천일염전은 대부분 북한 지역에 만들었다. 대동강 하구의 평안남도 광양만염전, 평안남도 덕동염전, 평안남도 귀성염전, 황해도 연백염전, 평안북도 청천염전, 평안북도 남시염전 등이 그것이다. 남한 지역에서는 경기도 군자염전, 남촌염전, 소래염전 등이 있었다. 1944년까지 전국에 총 2,835정보(약 850만평)의 천일염전이 구축되었다. 자염은 천일염에 비하여 염도가 순하고, 쓴 맛과 떫은 맛이 없으며, 칼슘과 아미노산 함량이 높다는 점 등에서 매우 우수하지만, 결국 천일염의 대량 생산에 밀렸으며, 땔감을 얻기 위한 벌채를 금지한 산림법과 담배, 인삼, 소금을 조선총독부의 전매품목으로 지정한 전매법에 의해 맥이 끊겼다. 한편, 1979년 울산에 이온교환식 기계염 공장이 완공되고 인공화학염(정제염)을 생산하면서, 천일염도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Yu, 2007).

3.4 곰소만 일대의 소금 생산 방식

동해안에서는 바닷물을 바로 끓이는 해수 직자법, 그리고 서해안에서는 갯벌을 이용한 염전식 제염법을 사용하였다. 서해안 갯벌에서의 자염은 불을 지펴서 끓였다는 뜻에서 화염, 바닷물을 끓여 졸인다는 뜻에서 전오염, 갯벌 흙을 이용한다는 뜻에서 육염 또는 토염 등으로 불린다. 해수 직자법은 바닷물을 모두 증발시켜야 하기 때문에 연료가 많이 필요하며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에 반하여 염전식 제염법은 갯벌에 염전을 만들어 바닷물에 소금을 농축시킨 후에 이를 끓이는 방법이다. 염전식 제염법의 작업 과정에는 첫째, 염전작업 : 소를 이용하여 써래질로 염전을 갈아엎는 작업, 둘째, 채함작업 : 소금을 농축시킨 함수를 모으는 작업, 셋째, 전오작업 : 가마에서 함수를 끓이는 작업 등 크게 3가지 단계가 있다(Kim, 2002).

염전작업이나 전오작업에는 지역적 차이가 없으나, 채함작업에는 태안군 지역의 통자락 방식, 신안군 지역의 섯등 방식, 그리고 곰소만 지역의 섯구덩 방식 등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갯벌 흙의 입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Kim, E.H., 2004). 통자락 방식은 모래가 10% 정도 섞인 갯벌에서, 그리고 섯등 방식은 점토와 미사질 갯벌에서의 방식이다. 곰소만의 섯구덩 방식은 특히 모래질 갯벌에서 적합하다. 곰소만의 검당마을이 위치한 곳이 고창군 심원면 사등마을인데, 이때 사등(沙登)은 모래 둔덕이라는 뜻이다(Park, 2008). 섯등 방식에서는 바닷물을 퍼올려 섯등에 부어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섯구덩 방식에서는 이러한 노동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그 대신 섯구덩의 위치를 신중하게 결정하여야 한다.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가장 적은 때, 즉 조금 전후로 7-8일 동안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모래가 약간 섞인 갯벌에서 섯구덩 작업을 하고, 사리 전후로 여기에 바닷물이 들게 하여 함수를 모은다. 그리고 이 함수를 가마솥이 설치된 움막(염막, 벌막)으로 옮겨 끓인다. 가마솥은 흙과 조개껍질로 만든 토가마(토부)나 쇠로 만든 철가마(철부)를 이용하였다. 곰소만 일대에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400-500 m 높이의 산지가 넓게 분포하고 있어 가마에 불을 때기 위한 연료(땔감)를 조달하기에 유리했던 것으로 보인다(Kim, 2009).


4. 토 론(곰소만 일대의 해수면 변동)

곰소만 주변에는 김제 원평천의 벽골제(碧骨堤), 익산 탑천의 황등제(黃登堤), 정읍 고부천의 눌제(訥堤) 등 삼한시대 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제방이 몇 군데 있다. 이 중에서 벽골제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황등제와 눌제의 축조 시기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축조 양식이나 고문헌 기록 등을 통하여 약 300-500년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 제방은 일반적으로 농업용수를 저장하는 저수지와 같은 수리관개 시설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해의 큰 조수간만의 차로 인하여 밀물 때에 바닷물이 하천을 따라서 들어오는 것을 막아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한 방조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Park et al., 2003; Kim, H.K., 2008). 최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수행한 서해안의 영산강, 금강, 만경강, 동진강 일대에서의 퇴적물 시추조사 결과에 의하면 약 2000년 전에 바닷물이 하천을 따라서 상당히 내륙으로 들어왔었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감안한다면 과거 제방의 방조제 역할 가능성에도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KIGAM, 2014, 2016). 벽골제 제방 바닥면의 해발고도가 약 3 m 정도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밀물 때의 조수가 3 m 이상의 높이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현재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선사(黔丹禪師)의 도움으로 자염 생산을 시작할 때에 섯구덩을 만든 위치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곰소만 주변의 벽골제, 황등제, 눌제 등 제방의 위치와 높이로 미루어 추정하자면 섯구덩의 위치는 검당마을 바로 앞의 조간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고려 시대의 검당마을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조선 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 윤은보, 신공제, 홍언필, 이사균, 1530) 무장현 편에는 검당마을의 소금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검당포에 있는데 바다로 2리 남짓 들어갔다. 그 물이 희고 짜서 토착민들이 조수가 물러가기를 기다려서 다투어 길고(물 퍼올리는 기구)를 써서 길어다가 다려서 소금을 만드는데...” 라는 기록에 의하면 1530년 정도에는 검당마을 앞 갯벌을 바다쪽으로 2리(약 800 m) 정도 들어간 지점에 섯구덩 작업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초에는 검당마을 바로 앞에서 섯구덩 작업을 하였다. 즉, 1500년대와 1900년대의 섯구덩 위치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해수면 높이 또는 해수면 영향 범위의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앞서 부연한 바와 같이, 섯구덩 위치는 사리(대조) 때에만 바닷물이 들어오는 가장 육지쪽 장소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옛 지도 중 대부분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도 제작 당시의 해안 지형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부족하다. 그런데, <지방지도>의 고부군 지도(1872)에는 “扶安茁浦 海水深二十一尺”, 그리고 “扶安東津 水深十六尺” 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즉, 줄포(부안군 줄포면)의 바닷물의 깊이가 21척(4.37 m), 그리고 동진강과 고부천이 만나는 지점(부안군 동진면 일대)의 바닷물 깊이가 16척(3.33 m)라는 것이다. 참고로, 조선 4대 세종 이후 1902년 미터법이 도입될 때 까지 1척은 20.795 cm이다. 바닷물 수심의 측정 위치와 시기가 정확하지는 않으나, 만조 때의 수심을 측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81년 국토지리정보원의 자료에서 곰소만의 약최고고조위(highest high water, HHW)가 3.69 m인 것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러한 고문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수면은 1500년대에 하강했다가 1800년대에 다시 현재 수준으로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토사 유입으로 인하여 곰소만 검당마을 앞바다의 지대가 높아졌다든지, 조수간만 차이의 변화가 있었다든지 등의 변화도 있겠지만, 이러한 기작을 논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며 또 그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따라서, 1500년대에는 해수면이 하강하여 만조 때에도 조류의 영향 범위가 검당마을 바로 앞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며, 이에 바다 쪽으로 약 800 m 떨어진 곳에 자염 생산을 위한 섯구덩의 위치를 잡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1800년대 이후에는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만조 때에 바닷물이 보다 내륙까지 올라오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섯구덩의 위치도 보다 내륙 쪽으로 옮겨 온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한편, <택리지>(이중환, 1751)에는 “나주의 서쪽은 칠산바다이다. 옛날에는 깊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모래와 앙금이 쌓여 점점 얕아져서, 썰물이 빠지면서 겨우 무릎이 빠질 정도이다. 한복판 한 군데 물길만이 강줄기와 같아서 배는 여기를 통해 다닌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는 해수면 변동이라기 보다는 토사 유입으로 인한 연안지역의 과퇴적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그 위치를 확인할 길은 없다.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암행어사 유경(1756-?)이 1799년에 '정읍 등 일곱 고을의 전세(田稅)를 실어 나를 곳'으로 사포를 추천하였는데, 이 기록이 사포는 1799년 이전 시기에 포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하였다는 뜻인지, 그리고 해수면이 낮아 바닷물이 충분히 유입되지 못했던 것이 그 원인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Kim et al. (1999)는 곰소만 조간대 퇴적물 시추시료에서 회수한 패각(조개껍질)의 위치를 근거로 과거 해수면을 유추한 바 있다. 참굴(Crassostrea gigas) 패각을 대상으로 414±81 (14C-age BP) 연대측정값을 얻었으며, 이를 보정하면 1519±82 (Calendric Age, A.D.)이 되는데, 이 때의 평균 해수면 높이를 -1.97±0.5 m로 추정하였다. 또한 마당조개(Dosinia japonica)를 대상으로 229±81 (14C-age BP) 연대측정값을 얻었으며, 이를 보정하면 1709±154 (Calendric Age, A.D.)이 되는데, 이 때의 평균 해수면 높이를 -0.77±0.5 m로 추정하였다. 이 결과를 보면 1500년대에 해수면이 약 -2 m 정도 낮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해수면 하강은 고문헌에 나타난 해수면과 관련된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단, 1500년대 조간대의 미세한 지형이나 지형 구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약 -2 m 정도 해수면이 하강한다면 조간대 지표면에서 직선거리로 약 800 m 정도가 드러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2013년 9월, 유엔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의 5차 보고서에서 Church et al. (2013)은 과거 2000년 동안의 전지구적 해수면 변동 폭은 대체로 ±25 cm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또한 Barlow et al. (2014)은 염습지 연구를 통하여 ±40 cm 정도, 그리고 Kopp et al. (2016)은 온도 변화를 반영한 모델 연구를 통하여 ±8 cm 정도의 변동 폭을 제시하였다. 곰소만의 해수면 변동 폭은 이들 연구 결과에 비하여 -2 m 정도로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 원인으로서 먼저 대조차 환경에서의 평균 해수면 위치 추적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 또한 Kim et al. (1999)은 곰소만에서 조수간만의 차이, 파랑의 영역, 수심의 기울기 등이 현세 중-후기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가정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과거 해수면을 유추하였는데, 사실 이러한 요소들은 강수량, 식생, 퇴적물 공급, 퇴적-침식 양상 등에 따라 다소 변화하였을 것이다. 곰소만에서의 과거 해수면 변화폭이 과거 2000년 동안의 전지구적 해수면 변동보다 실제로 더 크게 나타났을 수도 있고 더 크게 해석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전지구적 해수면 변동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5. 결 론

고문헌에 나타난 곰소만의 지형, 그리고 소금 생산에 관한 기록을 중심으로 역사시대 해수면 변동을 유추하였다. 해수면 혹은 조수간만의 차이는 500년 전후 시기에 현재의 위치와 거의 유사하였으며, 1500년 전후로 낮아졌고, 1800년대 이후로는 다시 상승하면서 지금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동 양상은 곰소만 조간대에서 시추시료를 분석한 기존 연구 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하며, 또 전지구적 변동 양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 변동 폭에서 차이가 나는 문제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큰 지역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향후 보다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고문헌 기록은 다소 정성적이며, 연속적인 관측 기록이 없어 고해상도의 연속적인 해수면 변동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고문헌 기록에 보이는 해수면 변동은 해수면 그 자체의 상승과 하강으로 보이지만, 아무래도 인간 활동이 왕성한 시기이기에 간척과 매립, 그리고 토사 유입으로 인한 지형변화에 따른 해안선 위치 변화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한편, 소금 생산 위치에 대해서는 소금이 주요 세금원이라는 점, 지역 주민의 주요 생계 수단이라는 점,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조수간만의 차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신중하게 그 위치를 결정하였을 것이며, 또 이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차후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 위치를 복원한다면 과거 해수면 변동이나 해안선 위치를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Acknowledgments

본 연구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지질 기록체를 활용한 한반도 아열대화 규명 연구: 중기 홀로세 기후-지표환경 특성 평가”, “지질자원 표본-기초학술연구와 탈추격 R&D 정책개발 (지오덕후: 소금을 찾아서)” 연구과제의 일환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논문을 세세하게 검토하고 좋은 의견을 주신 이진용 편집위원님, 임현수 교수님과 익명의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연구 시작 단계부터 많은 도움 말씀을 주신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 류승훈님께 깊은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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