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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

[ Review ]
Journal of the Geological Society of Korea
Abbreviation: J. Geol. Soc. Korea
ISSN: 0435-4036 (Print) 2288-7377 (Online)
Online publication date 04 Apr 2024
Received 22 Mar 2024 Revised 08 Apr 2024 Accepted 11 Apr 2024
DOI: https://doi.org/10.14770/jgsk.2024.008

한국 최초의 지질학 논문, 「Geologische Skizze von Korea」: 역사적 고찰
최덕근1 ; 홍발2, ; 이승배2
1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2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지질박물관

The first geology paper in Korea, 「Geologische Skizze von Korea」: a historical perspective
Duck K. Choi1 ; Paul S. Hong2, ; Seung-bae Lee2
1School of Earth and Environmental Sciences, Seoul National University, Seoul 08826, Republic of Korea
2Geological Museum, Korea Institute of Geoscience and Mineral Resources, Daejeon 34132, Republic of Korea
Correspondence to : +82-42-868-3103 / E-mail: hongps@kigam.re.kr

Funding Information ▼

초록

한반도 지질을 다룬 최초의 논문은 독일 지질학자 곳체(Gottsche)가 1886년에 발표한 「Geologische Skizze von Korea」다. 이 논문은 19세기 후반 곳체가 조선을 방문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의 조사활동 그리고 「Geologische Skizze von Korea」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지질학의 출발점을 과학사적 관점에서 들여다보았다.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유교에 바탕을 둔 전통사회의 해체, 동·서양 열강들의 침략, 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과 개항 그리고 이에 따른 위정척사세력과 개화세력이 갈등을 겪었던 격동의 시대였다. 그 무렵, 외국과의 수교통상과 개화를 도와줄 서양인 고문이 필요했던 조선은 1882년 독일인 묄렌도르프(Möllendorff)를 초빙하여 외교와 경제정책 시행에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조선의 경제발전에 광산개발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묄렌도르프는 당시 일본 도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곳체에게 한반도의 지질조사를 의뢰했다. 곳체는 1884년 약 5개월 동안 한반도의 암석을 종류와 지질시대에 따라 구분하는 기초조사를 수행하여, 그 내용을 「Geologische Skizze von Korea」에 담아냈다. 짧은 기간의 조사로 인하여 암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논문의 내용 중에 틀린 곳이 있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지질계통과 지질도를 제시한 최초의 논문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Abstract

The first paper dealing with the geology of the Korean Peninsula is 「Geologische Skizze von Korea」 written by a German geologist, Carl Christian Gottsche, in 1886. This article delves into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Gottsche's visit to Korea, his activities in Korea, and evaluation on 「Geologische Skizze von Korea」. During the latter half of 19th Century, the Joseon Dynasty experienced an era of transformation owing to the dissolution of Confucianism-based traditional society, invasions of oriental and occidental powers, and inevitable conflict between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groups. The Joseon Dynasty attempted to improve diplomatic relations and trades with foreign countries and accordingly invited a foreign advisor, Paul Möllendorff, who played a crucial role in the field of foreign affairs and economic development of the Joseon Dynasty during his tenure. Möllendorff realized the importance of mining exploration for economic development and subsequently invited Prof. Gottsche of the University of Tokyo for geological survey of the Korean Peninsula. In 1884, Gottsche investigated the Korean Peninsula for five months and published the paper, 「Geologische Skizze von Korea」. Gottsche was not able to understand clearly the nature and geologic ages of rocks of the Korean Peninsula, apparently due to the short period of survey. Nonetheless the paper can be treated to be of great significance in generating for the first time the geologic system and geologic map of the Korean Peninsula.


Keywords: Korean Peninsula, geologic map, geologic system, Gottsche, history of science
키워드: 한반도, 지질도, 지질계통, 곳체, 과학사

1. 서 론

지질학은 지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지질학은 지구를 이루고 있는 물질, 지구의 내부구조, 그리고 그 형성과정의 역사를 다루는 자연과학의 한 분야라고 말할 수 있다. 지질학의 가장 독특한 점은 연구과정에서 항상 시간을 고려하는 일이며, 이러한 점에서 자연과학의 다른 분야와 뚜렷이 구분된다.

‘지질학(geology)’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때는 17세기 초였다. 하지만, 이 용어가 대중화된 것은 1807년 영국에서 런던지질학회(The Geological Society of London)가 설립된 이후였다. 지질학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누중의 법칙과 동일과정설은 각각 17세기와 18세기에 등장했지만, 이 원리를 적용하여 사람들이 암석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선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지질학은 탄생한지 200년 남짓의 짧은 역사를 가진다.

과거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지질현상(예를 들면, 화산, 지진, 온천, 운석 등)과 광산 채굴에 관한 사항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Won et al., 2017). 하지만, 한반도의 암석을 다룬 최초의 문헌은 지질학 탄생 초기인 19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영국의 Hall (1818)은 1816년 9월 우리나라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들른 섬들의 암석과 지질구조에 관해서 서술했다. Guppy (1881)는 한반도 남서 해안에 있는 섬들의 암석을 간략히 소개했고, Gottsche (1884)는 평안도 북부에 캄브리아기 암석과 화석이 있음을 보고했다. 그런데 Hall (1818)은 기행문의 성격이고, Guppy (1881)Gottsche (1884)는 전문 학술지에 실리기는 했지만 1페이지 내외의 단보(短報)다.

한반도를 현대 지질학의 관점에서 조명한 최초의 논문으로 독일 지질학자 칼 크리스티안 곳체(Carl Christian Gottsche)가 1886년에 발표한 「Geologische Skizze von Korea (조선의 지질 개관)」(Gottsche, 1886a)을 지목할 수 있다. 곳체는 1884년 6월에서 11월에 걸쳐서 한반도 곳곳을 답사하여 암석의 종류와 지질시대에 따라 기술한 논문을 독일 학술지에 발표하였다. 1884년은 은둔의 나라 조선이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인데, 독일인인 곳체가 어떤 연유로 한반도의 지질을 조사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 논문에서는 19세기 후반 곳체가 지질조사를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의 조사활동 그리고 「조선의 지질 개관」의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지질학의 출발점을 과학사적 관점에서 고찰해보려고 한다.


2. 역사적 배경
2.1. 19세기 후반, 격동기의 조선

19세기 후반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중국에 종속되었던 오랜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과 함께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온갖 진통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사의 시대구분에서 근세와 근대를 구분하는 시점으로 외국과 맨 처음 수교조약이 체결되었던 1876년을 지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그 시점을 약간 빠르게 또는 늦게 고려하기도 하지만, 19세기 후반은 한국 사회가 크게 바뀐 시대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는듯하다(Ryu, 2018). 간추리면, 19세기 후반의 한국은 유교에 바탕을 둔 전통사회의 해체, 동·서양 열강들의 침략, 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과 개항 그리고 이에 따른 위정척사세력과 개화세력이 갈등을 겪었던 격동의 시대였다(Cho, 2002; Sin, 2002).

19세기 중엽, 동아시아 3국 중에서 상대적으로 일찍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은 서구인들에게 미지의 세계였다. 동양으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던 서구 열강들이 상선이나 군함을 보내어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무렵, 고종의 즉위(1863년)와 함께 권력의 실세가 된 흥선대원군이 외세와의 갈등 과정에서 취했던 조치 중 하나가 1866년에 일어났던 천주교도 학살사건이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처형당했던 한국인 천주교도는 8,000여 명 그리고 프랑스 선교사 9명이었다. 병인박해로부터 살아남은 한 프랑스 신부가 중국에 주둔 중이었던 프랑스 함대에 그 사실을 알렸고, 이를 응징하기 위해서 출동한 프랑스 함대가 1866년 10월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이 병인양요다. 이보다 앞서서 1866년 7월에는 미국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통상을 강요하다가, 배가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871년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하면서 5척의 군함으로 강화도를 공격했는데, 이 사건이 신미양요다. 두 차례의 양요에서 적들을 물리친 후, 자신감을 갖게 된 대원군은 척화비를 곳곳에 세워 쇄국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Kim, 2002).

한편, 대원군은 오랜 기간 외척의 세도에 밀려 추락해 있던 조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1865년 경복궁 중건사업을 벌였다. 경복궁 중건에는 엄청난 경비가 필요했고, 대원군은 그 경비를 충당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당시 서원들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세 혜택을 받고 있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대원군은 몇몇 중요한 서원을 제외하고 모든 서원을 철폐하라는 강경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서원철폐는 지배계층이었던 사대부와 유림(儒林)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고, 결국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이어졌다(Sung, 2002).

대원군이 물러난 후에 대원군이 추진했던 쇄국정책은 약화되었다. 그러자 일본은 1875년 군함 운요호를 보내어 강화도 일대를 침공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다음 해인 1876년에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조선에 통상을 요구했고, 그 결과 체결된 조약이 조일수교조규(보통 ‘강화도조약’으로 불림)다.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국제조약으로 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는 단초가 되었고, 1882년 5월에 미국과 조미수호조약 그리고 8월에는 중국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Song, 2002).

나라의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일본과 중국처럼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정책을 펼쳐야 했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1881년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일본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였는데, 이 군대가 별기군이다. 양반 자제를 중심으로 선발되었던 별기군 군인들은 모든 면에서 우대를 받은 반면, 구식 군인들은 상대적으로 홀대를 당했다. 이에 불만이 쌓인 구식 군인들은 1882년 6월 난동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 교관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이 사건이 임오군란이다(Koo, 2002).

곤경에 처한 고종은 임오군란의 수습을 대원군에게 맡겼다. 실각한 후 거의 10년 만에 돌아온 대원군은 구식 군인들을 달래는 한편, 군제를 개편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Koo, 2002). 그런데, 그 무렵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중국에 가 있었던 김윤식이 청의 실권자인 이홍장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홍장은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어 임오군란을 진압한 다음, 대원군을 중국으로 납치해 갔다(Koo, 2009). 1882년 8월, 일본은 임오군란에서 일본인 교관이 살해당한 데 대한 피해배상을 요구하면서 제물포조약을 맺었고, 일본공사관을 경비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1개 대대 병력을 한성에 주둔시켰다(Koo, 2002).

1882년 11월, 고종은 전권대신 조영하를 중국으로 보내어 이홍장에게 조선의 개화를 도와줄 서양인 고문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이홍장은 서양과의 수교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외교와 해관(지금의 세관) 업무에 밝은 외국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함께 당시 중국의 독일영사관에 근무하고 있던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를 고문으로 추천하였다(Yoon, 2002). 목인덕(穆麟德)으로 불리는 묄렌도르프는 1882년 12월 말 조선에 도착해서 약 3년 동안 조선 정부의 요직을 맡으면서 외교와 경제정책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Lee, 2023).

묄렌도르프가 재임하는 3년 동안에 조선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1883년 10월 조영통상수호조약 그리고 11월에 조독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 1884년에는 조이통상수호조약과 조로통상수호조약이 잇달아 체결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사건은 1884년 12월에 급진개화파가 일으켰던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일본, 청, 러시아와 복잡한 사건들로 얽히게 되었고, 그 후폭풍으로 묄렌도르프는 1885년 11월에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Lee, 2023).

이후 1894년에 고부민란과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으로 청과 일본 사이에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정부를 세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후 조선은 1895년 을미사변과 1896년 아관파천 등 치욕적인 사건들을 잇달아 겪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1897년 나라 이름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주독립국가로 발돋움하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수모를 겪는다.

2.2. 조선에서 묄렌도르프의 활동

묄렌도르프는 1847년 독일의 체데니크(Zehdenick)에서 태어났고, 할레대학교(Universität Halle)에서 법학, 언어학, 동양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진로가 불투명했던 묄렌도르프는 지인의 조언에 따라 중국으로 진출하여 1869년 상하이 해관에서 근무했다. 묄렌도르프는 중국과 중국어 공부에 진력하여 1874년부터 독일 영사관과 공사관의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1879년에는 톈진(天津)의 독일 영사 대리로 재임하면서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북양대신 이홍장과 친분을 쌓았다. 그 무렵, 묄렌도르프는 주청 독일 공사였던 브란트(Max von Brandt)와의 불화 때문에 중국에서 외교관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Möllendorff, 1930).

한편, 임오군란 진압에 이홍장의 도움을 받았던 고종은 1882년 11월 조영하를 이홍장에게 보내어 외국과의 수교와 조선의 개화를 도와줄 서양인 고문 추천을 의뢰했다. 이에 이홍장은 묄렌도르프를 적임자로 추천하였고, 묄렌도르프도 조선에서의 고문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영하 일행과 함께 1882년 12월 4일 톈진항을 출발하여 12월 9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묄렌도르프는 12월 26일에 고종을 알현한 후, 곧바로 수교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통리아문 내무협판(지금의 차관급)에 임명되었다. 묄렌도르프가 맨 처음 추진했던 사업은 해관 설치와 광산개발이었다. 묄렌도르프는 1883년 4월에 조선 해관의 총세무사(지금의 관세청장), 1884년 3월에 화폐 주조를 위해 설치된 전환국의 총판(지금의 조폐공사 사장), 의정부 참찬, 그리고 병조참판을 역임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 노력했다. 묄렌도르프가 재임했던 기간에 영국(1883년), 독일(1883년), 이탈리아(1884년), 러시아(1884년)와 잇달아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점에서 묄렌도르프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1884년 12월 급진개화파가 일으켰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후, 묄렌도르프는 조선이 청과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1885년 초, 묄렌도르프는 갑신정변에 대한 대일사절단의 부대표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주일러시아공사와 접촉했다. 이때 묄렌도르프와 주일러시아공사는 러시아 군사교관 초빙과 부동항인 영흥만을 러시아에 조차한다는 내용에 합의하였고,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고종으로부터 러시아와의 합의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이것이 조러밀약(朝露密約)이다.

그러나 조러밀약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이 거세졌고, 이에 고종은 묄렌도르프를 모든 공직에서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 묄렌도르프는 1885년 7월 외무협판 해임, 9월 조선 해판 총세무사 사임, 10월에 전환국 총판에서 해임되었다. 1885년 12월, 이홍장에 의하여 중국으로 소환되었던 묄렌도르프는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1901년 급환으로 타계하였다(Möllendorff, 1930).

2.3. 곳체의 한반도 답사

조선 최초의 서양인 고문으로 부임한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발전에 광공업 진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광산개발에 적극적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조선과 청 사이의 정기항로 문제를 영국과 협의하는 과정에 영국에 채광권을 이양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광산개발을 위한 기초자료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일본 도쿄대학의 지질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곳체에게 지질조사를 의뢰했을 것이다.

곳체(Carl C. Gottsche)는 1855년 독일 함부르크 교외의 알토나(Altona)에서 태어났다. 곳체는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과 뮌헨(München)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했으며, 1878년 ‘아르헨티나 코르디예라(Argentine Cordillera)의 쥐라기 화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80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지방의 빙하퇴적층에 관한 논문’으로 교수자격을 획득한 후, 킬(Kiel) 대학 광물학과의 강사가 되었다. 1881년, 곳체는 도쿄대학 지질학과의 외국인 교수직을 제안 받고 일본으로 향했다(Wolff, 1909).

그 무렵, 일본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메이지유신의 일환으로 외국학자들을 대학교수로 초빙하는 정책을 펼쳤다. 1877년 설립된 도쿄대학 지질학과 초창기의 교수들은 모두 독일인이었으며, 나우만(Heinlich E. Naumann, 1877~1880), 브라운즈(David A. Brauns, 1880~1882)에 이어 곳체는 1882년 5월에서 1884년 3월까지 도쿄대학 지질학 교수로 재직했다. 곳체 이후에는 독일에서 교육을 받은 일본인 지질학자들이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곳체는 1883년과 1884년 두 차례에 걸쳐서 조선을 방문하였다. 1883년 첫 번째 방문에서 곳체는 조독수호통상조약의 독일 대표였던 주요코하마 독일총영사 자페(E. Zappe)와 함께 조선을 방문하였다. 곳체가 논문(Gottsche, 1886a)에서 “당시 외무차관 묄렌도르프의 주선으로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임에도 조선 정부는 나에게 조선을 여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밝히고 있는 점에서 당시 광산개발을 중요하게 여겼던 묄렌도르프가 조독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위한 독일방문단에 곳체를 포함시키도록 요청했을 것이다. 자페와 곳체 일행이 인천에 도착한 것은 1883년 10월 26일이었으며, 다음 날인 10월 27일 한성에 도착했고(Son, 2016), 한 달 후인 11월 26일에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통상조약 체결 후, 일본으로 돌아간 곳체는 1884년 3월 도쿄대학과의 계약을 마무리하고 두 번째 조선 방문길에 올랐다. 곳체가 조선에 입국한 시점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곳체가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1884년 12월) 조선에 있었고(Möllendorff, 1930), 논문에서 조선에 8개월 동안 체류했다는 언급으로부터 판단했을 때, 곳체는 1884년 4월 하순 또는 5월 초에 조선에 입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곳체는 야외조사를 두 차례로 나누어 수행했고, 총 138일 동안에 6,380리(2,550 km)를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Gottsche (1886a)의 머리말에는 “조사기간에 비하여 연구성과가 미흡했던 것은 조선의 지질에 대한 사전연구가 전혀 없었고, 불편한 교통여건, 그리고 호기심 많은 조선인들의 극성 때문”이라는 구절이 있다. 곳체보다 10년 후인 1894년 조선을 방문했던 독일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Hesse-Wartegg, 1895)에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다녔다”고 기술한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을 엿볼 수 있다.

곳체는 Gottsche (1886b)에서 “한국의 8개 도를 모두 섭렵했고, 350개의 도시 중에서 80개 도시를 방문했으며, 총 2,550 km를 여행했다”고 조사일정을 요약해 놓았다. 조사는 남부여행(1884년 6월 11일~8월 15일)과 북부여행(1884년 9월 18일~11월 28일)으로 나뉘어 이루어졌고, 두 여행 사이에 약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 조선에 도착한 후 한 달 남짓 지나서 조사를 시작한 것을 보면, 답사준비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질조사를 할 때는 여러 가지 도구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지도, 컴퍼스(compass), 조사용 망치, 관찰한 사항을 기록할 노트, 확대경 등이다. Gottsche (1886a)는 조사할 때 사용했던 한반도 지도가 독일의 지도 제작회사인 PGM (Petermanns Geographischen Mitteilungen)이 1883년에 발간한 지도라고 주석을 달았다. PGM 발간 한반도 지도의 축적은 1:1,700,000이었고, 크기는 세로 52 cm, 가로 26.5 cm였다(Son, 2016). 따라서 1:1,700,000 축척의 지도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들고 다녔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축척 1:160,000의 대동여지도에는 10리마다 점이 찍혀있는데, 곳체의 논문에 거리의 단위로 리(약 400 m)가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곳체가 독일로 돌아간 직후 근무했던 함부르크 자연사박물관에 현재 소장되어 있는 대동여지도는 곳체가 기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Son, 2016).

곳체가 조선에서 지질조사를 할 때,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점은 조선 내륙에서의 여행 자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철도가 처음 개설된 때는 1899년이었고, 차가 다니는 도로는 20세기 들어선 이후에야 건설되었으므로 1884년이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을 할 때, 곳체를 수행했던 사람도 여러 명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곳체의 조사를 행정적으로 도와주는 관원, 통역하는 사람, 짐을 운반하는 사람 등이다. 당시 이동은 걷거나, 조랑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는 방법이었을 텐데, 아마도 조사에 필요한 물건들은 조랑말에 실었어도 사람들은 대부분 걸었을 것이다. 조사일 수와 이동거리로 추정해 봤을 때, 하루에 20 km 이상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곳체의 남부여행은 1884년 6월 11일에서 8월 15일까지 66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총 이동거리는 3,320리(1,328 km)였다. Gottsche (1886b)에 정리된 남부여행 경로를 요약하면, 제물포를 출발하여 서울과 경기도 광주를 지난 다음, 충청도 괴산, 경상도(문경-함창-영천-경주-울산-양산-부산-김해-고성-하동), 전라도(구례-광주-나주-무안-목포-해남-영암-나주-장성-태인-전주), 충청도(금산-연산-공주-천안), 수원을 거쳐서 서울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울에서 한 달을 머문 후에 이어졌던 북부여행은 1884년 9월 18일에서 11월 28일까지 72일 동안이었으며, 이동거리는 3,060리(1,224 km)였다. 이동경로는 서울을 출발해서 경기도(파주-개성-이천-신계-수안), 평안도(삼등-평양-자산-개천-영변-고장-위원-강계), 함경도(장진-황화령-함흥-영흥), 강원도(원산-안변-회양-김화), 경기도 포천을 거쳐서 서울에 도착했다(그림 1).


Fig. 1. 
Geologic map of Korea, illustrated in Gottsche (1886a). Gottsche's route for geological survey in 1884 is indicated by dashed lines highlighted in blue. The image is prepared by the Smithsonian Libraries and can be accessed through the Internet Archive at https://archive.org/download/sitzungsberichte1886deutsch/sitzungsberichte1886deutsch_orig_jp2.tar.

곳체는 Gottsche (1886b)에서 “1884년 12월 4일의 일본인 쿠데타(갑신정변을 의미)로 말미암아 조선에서의 체류가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고 밝히고 있다. 곳체가 북부여행에서 돌아온 때가 11월 28일이고,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도 서울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질조사를 계속 진행하려는 계획이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후 조선에서 활동한 기록이 없으므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조사계획이 취소되어 조선을 떠난 것으로 판단된다.

1885년 독일로 돌아간 곳체는 함부르크 자연사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한 후에 1890년에 킬 대학 광물·지질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897년에 이 학과의 학과장이 되었다(Son, 2016). 곳체는 1909년 타계하였다.


3. 곳체의 1886년 논문, 「조선의 지질 개관」 요지와 해석

곳체는 한반도에서 조사한 내용을 논문 4편으로 나누어 발표했는데, 「조선에서 캄브리아기층 발견」(Gottsche, 1884), 「조선의 지질 개관」(Gottsche, 1886a), 「조선의 땅과 사람들」(Gottsche, 1886b), 그리고 「조선의 광물」(Gottsche, 1889)이다. Gottsche (1884)는 평안도 북부의 압록강 부근에 분포하는 캄브리아기 지층을 보고한 1페이지 남짓한 짧은 논문이고, 그 내용은 Gottsche (1886a)에 거의 그대로 실려 있다. Gottsche (1886b)에서는 한반도의 인문지리와 자연지리에 관한 사항을 상세히 기술하였고(Son, 2016), 조선의 광물자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후 Gottsche (1889) 논문을 통해 발표되었다. 여기서는 1886년에 발간된 「조선의 지질 개관」(Gottsche, 1886a)의 내용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 참고로 이 논문의 한글 번역본이 Kim (1987)에 의하여 발표되었다.

3.1. 논문의 서론

곳체는 논문의 서론에서 조사배경과 한반도 지형과 지질을 종합적으로 소개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결정편암류(Krystallinische Schiefer; 지금의 변성암에 해당)는 한반도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며, 경상도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결정편암류로 이루어진다. 평안북도 위원, 초산, 고장 부근에서 결정편암류 위에 부정합으로 놓여있는 사암, 이회질 슬레이트,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층은 캄브리아기에 해당한다. 경상도 지방에 넓게 분포하는 이회암과 역암으로 이루어진 지층은 상부 고생대층인 것으로 생각되며, 같은 지층이 전라도 지방에도 소규모로 분포하고 있다. 평안도의 대동강과 청천강 유역에 드러난 함탄층은 제3기에 속하며, 고생대층은 아닌 듯하다. 화성암은 고기 화성암과 신기 화성암으로 나뉘며, 고기 화성암은 대부분 화강암이고, 신기 화성암은 현무암과 조립현무암이다. 한반도에는 활화산이 없으며, 지진도 일어나지 않는다.

서론에 이어서 암석을 시대 순으로 자세히 기술하였는데, 변성암과 퇴적암은 1) 선캄브리아시대 결정편암류, 2) 캄브리아기, 3) ?석탄기, 4) ?제3기, 5) 현생퇴적층 등 다섯 시기로 구분하였고, 화성암은 6) 고기 화성암류와 7) 신기 화성암류로 나누었다.

곳체는 이 중 결정편암류를 중국의 진단계 상부에 대비될 것으로 생각했다. 19세기 후반의 진단계(Sinian System)는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중원생대와 신원생대를 아우르는 개념이었다.

3.2. 변성암과 퇴적암에 관한 기술

선캄브리아시대 결정편암류: 결정편암류는 편마암-운모편암 층군과 상부(천매암-) 층군으로 나누어 기술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편마암-운모편암 층군(Gneiss-Glimmerschiefer-Gruppe)은 주로 흑운모 편마암이며, 백운모 편마암은 없다. 편마암의 구조는 대부분 편암상이고, 드물게 호상이나 화강암질, 안구상도 보인다. 편마암에 수반되는 암석으로 운모편암, 각섬편암, 녹니편암, 활석편암, 석회암, 돌로스톤 등이 있다. 상부(천매암-) 층군[Obere (Phyllit-) Gruppe]에서는 그들의 분포지역을 나열하였다.

곳체의 논문에 수록된 지질도(그림 1)에 경상도 지방과 평안북도 중북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결정편암류로 그려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캄브리아기: 평안도 북부 압록강 부근의 위원, 초산, 고장 지방(그림 1 참조)에는 결정편암류 위에 부정합으로 놓이는 사암, 슬레이트,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두께 530 m의 퇴적층이 있으며, 심한 습곡구조를 보여준다. 석회암과 슬레이트에서 발견된 완족동물(Lingullela)과 삼엽충 화석(Agnostus, Dorypyge, Anomocare, Conocephalites)으로 판단했을 때, 지질시대는 캄브리아기에 속한다. 황해도와 평안도 접경지역에는 결정편암류 위에 석회암, 사암, 슬레이트, 역암으로 이루어진 지층이 놓여있지만, 화석을 발견하지 못해서 이 지층의 지질시대는 알 수 없다.

평안도 북부의 내용은 Gottsche (1884)의 논문을 거의 그대로 옮겨 실었다. 황해도와 평안도 접경지역의 내용 경우, 캄브리아기 항목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아 곳체는 이 지층을 평안도 북부지역의 캄브리아기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탄기: 경상도지방에는 상부 고생대층이 넓게 분포하고 있으며, 같은 지층이 전라도 진안에도 분포한다.

곳체가 경상도 지방의 암석을 상부 고생대층으로 생각한 것은 고생대 식물화석이 들어있는 문경지역의 함탄층과 경상도지방의 퇴적층을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곳체 자신도 이에 대한 확신은 없었던 듯하며, 그래서 소제목을 ‘?석탄기(?Carbon)’로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영천-신령과 마산-진해 부근의 퇴적암은 상부 고생대보다 젊어 보인다고 언급한 점에서 곳체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현재 알려져 있는 문경지역 함탄층은 석탄-페름기 평안누층군에 속하고, 영천-신령과 마산-진해의 퇴적암은 백악기 경상누층군에 속한다는 점에서 당시 곳체의 생각은 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제3기: 곳체는 평양 부근의 대동강과 북쪽의 청천강을 따라 드러난 식물화석이 들어있는 세립질 사암, 함탄층과 역암 그리고 함흥 부근의 함탄층을 제3기에 속하는 것으로 판단했지만, 뚜렷한 증거는 없다고 기술하였다.

소제목을 ‘?제3기(?Tertiär)’로 붙인 이유도 아마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동강의 함탄층의 경우, 현재는 중생대 대동누층군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Yang, 1999).

현생퇴적층: 마지막으로 현생퇴적층은 분포가 좁고 두께도 4∼5 m로 얇으며, 빙하퇴적층은 없다고 서술하였다.

3.3. 화성암류에 관한 기술

고기 화성암류: 고기 화성암류 중에서 가장 흔한 화강암의 산출지역을 한반도 곳곳에 표시하였다(그림 1). 비교적 넓게 분포하는 지역으로 서울의 북부와 동부, 경상도 남동부, 전라도 남서단 지역, 평안도 위원의 압록강 부근을 예로 들었다. 그런데, 화강암이 고생대층을 관입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화강암은 선캄브리아시대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반도의 화강암은 잘 알려진 것처럼 대부분 중생대에 속한다(Park, 2012). 따라서 곳체가 화강암의 지질시대를 선캄브리아시대로 생각했던 것은 조사과정에서 고생대층이 넓게 분포하는 태백산지역을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기 화성암류: 신기 화성암류를 대표하는 암석은 현무암으로 주로 한반도 중부 지역에 분포한다. 예를 들면, 함경도 남부 안변, 강원도 북부 회양-이촌, 황해도 신계, 경기도 파주 등이다.


4. 결 론

우리나라 최초의 지질학 논문, 「Geologische Skizze von Korea」가 1886년에 발간된 것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문호 개방과정에서 그 역사적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유교에 바탕을 둔 전통사회의 해체, 동·서양 열강들과의 통상조약 체결과 개항 그리고 이에 따른 위정척사파와 개화파가 갈등을 겪었던 시대였다. 그 무렵, 중국과 일본은 서양인들을 다양한 분야에 고문으로 등용하는 정책을 펼쳐 서양의 선진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에 외국과의 수교통상과 개화를 도와줄 서양인 고문이 필요했던 조선은 1882년 12월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초빙하여 외교와 경제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조선의 경제발전에 광산개발이 중요하다고 여겼던 묄렌도르프는 당시 일본 도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독일 지질학자 곳체에게 한반도의 지질조사를 의뢰했고, 곳체는 1884년 약 8개월 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한반도 암석을 종류와 지질시대에 따라 구분하는 조사를 수행하였다. 곳체는 자신이 조사했던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했고, 1886년에 발간된 「Geologische Skizze von Korea」에서 한반도의 지질을 체계적으로 기술하였다. 이 논문의 가장 중요한 성과의 하나는 논문의 말미에 한반도 지질도(그림 1)를 수록했다는 점이다.

지질도에는 어느 지역의 암석을 종류와 지질시대에 따라 구분한 내용이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지질도에는 땅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지질학자들은 지질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Gottsche (1886a)에 수록된 지질도는 한반도 최초의 지질도라는 점에서 과학사적 의미가 무척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질도는 이후 연구자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수정·보완을 거쳐서 오늘날의 축척 1:1,000,000 한국지질도(Kee et al., 2019) 발간에 초석이 되었다. 물론 짧은 기간의 지질조사로 인하여 암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오류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한반도의 암석을 지질계통에 따라 소개한 최초의 논문이라는 점에서도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Acknowledgments

구하기 어려운 곳체의 논문 파일을 보내준 Gerd Geyer (University of Würzburg, Germany)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논문 심사과정에서 좋은 의견을 제시해준 편집위원분들과 심사위원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 연구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기본사업 “지질자원 표본·기초학술연구와 선도형 R&D 정책/성과확산 연구(GP2020-008)”의 지원을 받았다(홍발, 이승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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